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사 관련 정보 (문단 편집) == [[선사시대]] == [[구석기 시대]] 일본은 [[빙하기]]로 인해 [[한반도]] 및 [[타이완]], 남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시기에 인류가 일본에 첫 발을 딛었다.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일본은 섬이 되었고,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일본의 구석기 시대는 약 12만 년 전에 시작했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보다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70만~80만 년 전 유적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뜨기도 했지만, 죄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날조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시기의 유물과 화석인류는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는데, 일본은 판 경계 특성상 지각 변동이 심하다는 점, [[산(화학)|산성]] 화성암 토양이기 때문에 유골이 남기 어렵다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 대신 석회암 지대인 [[오키나와]]는 거짓말 보태서 섬마다 선사시대 인골이 나오는 수준. 자세한 건 [[오키나와/역사/선사시대]] 문서 참고.] 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고, 드문드문 발견되는 수준. [[시즈오카]]의 화석인류인 하마키타(浜北)인, [[1946년]] 발견된 [[군마현|군마]]의 이와주쿠(岩宿) 구석기 유적이 유명하다.[* 이와주쿠 유적을 발견한 고고학자 아이자와 타다히로(相沢忠洋)는 불우하고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낫토]] 장사를 하면서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했다. 고고학계의 인간 승리들 중 하나.] [[1946년]]까지는 일본 열도에는 구석기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와주쿠에서 타제석기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일본 구석기 문화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는 길게 보면 기원전 1만 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는 기원전 400년경을 전후로 한반도에서 유입한 [[도래인]]으로부터 급격하게 시작되었다. 도래인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기원전 400년 경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 긴 세월동안 원시 수렵 채집 생활만을 반복하고 있었던 조몬인과는 달리 야요이인은 한 단계 더 발전한 문명인 농경 문화, 금속 제련 기술을 보유한채로 일본 열도에 진출했고, 그들에 의해 일본 열도는 단기간에 매우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또한,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에서 87%~96.7%를 차지한다고 한다.'''[* [[https://media.springernature.com/full/springer-static/image/art%3A10.1038%2Fs42003-020-01162-2/MediaObjects/42003_2020_1162_Fig1_HTML.png?as=webp|조몬인 혈통 비율 3.3%]] [[https://static-curis.ku.dk/portal/files/249498821/s42003_020_01162_2.pdf|3.3% (2020)]] [[https://www.biorxiv.org/content/biorxiv/early/2019/03/15/579177.full.pdf|8% ~ 9.8% (2019)]] [[https://www.jstage.jst.go.jp/article/ase/advpub/0/advpub_190415/_pdf/-char/en|9% ~ 13% (2019)]] (연구 모델을 조몬인과 야요이인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 이후, [[기타큐슈]]와 [[혼슈]] 서부 및 남부[* 마찬가지로 이곳들이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진출하기 가장 용이한 장소이자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인접한 일본의 지역이다. 당시 이곳이 일본 문명의 직접적 기원이 된 반도 출신 야요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하고 인구를 늘려나간 시작점이라고 봐도 좋다.]를 중심으로 소국들이 세워졌으며, 이합집산을 거쳐 4세기 경에는 현재의 [[나라현]]에서 미약하게나마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갖춘 [[야마토]]가 등장하였고, 주변 소국들을 하나하나 복속시키며 외교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고훈 시대]](古墳時代)라고 한다. [[파일:external/heritageofjapan.files.wordpress.com/himiko-newton-graphic-science-magazine-nihon-no-ruutsu-2000-nen-6-gatsu-10-nichi.jpg]]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는 [[신화]]로 일본의 건국을 말하고 있지만, 대개는 신화적 서술과 [[이주갑인상]]을 포함한 연대상의 논란으로 교차검증 없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본격적으로 한반도나 중국 대륙과 경제, 군사, 문화 교류를 시작함으로써 존재감을 알린 것은 기원후이며, 그 때 일본은 ''''[[왜]]([[倭]])''''라는 이름으로 중국사와 한국사의 문헌에도 등장하게 됐다. [[왜국]] 문서 참조. [[일본]]은 [[삼국시대]] 초기의 [[백제]], [[가야|임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였고, [[신라]]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 동남해안을 수시로 노략질했다. 그 시기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에 대해서는 수 많은 학설들이 난립하고 있어서 쉽게 저술할 수는 없지만, 삼국 통일 전과 후가 확연히 대비될 정도로 많은 교류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특히, 백제와 가야의 정치적 혼란 및 멸망 시기에는 일본 열도행을 택한 많은 이주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 중에서 일본의 지배층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일본 사신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서 왜국전에서는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幷敬仰之恒通使往來, 즉 백제와 신라가 일본을 섬기는 것처럼 나와 있는데, 당연히 근거 없는 허세라고 봐야겠지만, 이를 볼 때 일본은 백제와 신라를 각각 '밀접하게 교류하는 국가', '자주 충돌하는 국가' 정도라면 몰라도 상국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어디까지나 일본쪽 학자들의 의견이지만. 다만, [[일본]]은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것 자체는 수많은 언급과 기록으로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기에 아직도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당시 일본의 기록과 백제쪽 기록을 대조해보면 사실상 상국으로 대우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일본 사학계에서 이걸 인정할리가 없으니 논쟁이 끝날리가 없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왕]]이 [[신라]]로 병력을 움직여 [[가야]]와 [[왜]]([[倭]])를 격파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도 단순히 가야가 왜를, 혹은 왜가 가야를 똘마니로 부렸다고 볼 게 아니라 그만큼 가야와 왜의 관계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큐슈에 있던 친가야 세력이 가야를 지원해 신라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종합하면 [[조몬 시대]]에 [[조몬인]]이 일본 열도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후 [[야요이 시대]]에 농경 문화와 금속 제련술을 알던 [[한반도]] [[도래인]]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되어 기존에 살고 있던 조몬인을 밀어내었고, [[야요이인]]이 되었다. 이후 세워진 국가인 [[야마토]]는 당시 [[삼국시대]]였던 한반도(그 중에서도 백제와 가야)와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야마토는 한반도로부터 전수받은 문물로 일본 열도 안에서 군사적·문화적으로 매우 강한 국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남서부 지역에 위치한 각종 소국들을 복속시켜 나갔으며,[* 당시 큐슈 서남부 일대에 소국들을 이루며 살던 종족들을 [[하야토]]라고 한다.] 점차 동쪽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조몬인 계통의 부족들도 정복하고 흡수하면서 일본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이 때 야마토 정권에게 밀려 혼슈 동북부와 홋카이도로 내몰린 조몬인 계통 세력이 [[에조]](에미시)이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혼슈 동북부가 완전히 일본으로 통합되었고, 홋카이도의 에조 세력인 [[아이누]]인들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일본에 통합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